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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쌀바람님 (@ricewind)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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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은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었다

부제: 물론 부재료로는 애정과 믿음을 듬뿍 담아서

 

<소설 타입> 4천자 + 디저트 (이니셜 옵션 O)

 

--

 

지금 이치조는 한 손으로는 사야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둘이서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본래라면 썰매를 같이 타거나 눈으로 하는 놀이를 즐겼을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일정이 그렇게 되었다. 사야는 단 것을 좋아했고, 이치조는 그 단 것을 챙겨줄 만큼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 것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사야가 아니었다.

, 재료를 거의 다 모았다. 이제 밀가루만 사면 돼.”

, 밀가루.”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주변에 있는 마트 직원들도 그런 그들에게 익숙해서, 오늘도 저 애들은 사이가 좋구나 하고 웃고 있었다. 레시피를 외워 온 이치조는 사야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여기 있어.”

.”

이치조는 사야가 집은 밀가루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그는 가볍게 웃으며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밀가루를 받아들었다.

사야. 그러고 보니 너희 집에 쿠키랑 같이 먹을 코코아가 떨어진 거 같던데. 가져올 수 있을까? 난 이거 챙기고 있을게.”

“....”

그리고 사야가 자리를 뜨자, 이치조는 빠르게 제 손에 들린 중력분과 선반 위에 진열된 박력분을 슬그머니 바꿔치기했다.

가져왔어.”

잘했어.”

물론 시치미를 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이번 요리 장소는 사야의 집이었다. 사야의 부모님은 지금 외출 중이었지만, 사야가 뭘 해도 너무 위험하지만 않다면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셨다. 그건 사야와 같이 다니는 이치조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손을 씻고 부엌에 모였다. 이치조가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체와 주걱, 볼 등을 꺼낼 동안 사야는 테이블에 모인 재료를 들여다보았다. 설탕, 버터, 달걀, 밀가루. 그리고...

코코아... 이 정도면 많이 남아 있는데?”

? 내가 착각했나 보다. 그래도 쿠키에 넣어도 되니까. 괜찮지?”

알았어.”

사야를 납득시킨 이치조는 체를 챙겨들었다.

그럼 난 버터랑 달걀이랑 필요한 만큼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밀가루를 체에 치고 있어 줄래? 저울 영점은 내가 맞춰 놨어. 여기 적어둔 만큼 하면 돼.”

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치조가 바구니에 달걀을 쓸 만큼 챙겨 놓은 뒤 버터를 자를 동안, 공기 중에 하얀 연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건 연기가 아니라 밀가루였다.

콜록! 콜록!”

아이고.”

이치조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사야의 팔을 살포시 잡아서 멈추게 했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체를 넘겨받아 본인이 전부 작업을 끝냈다.

“...부엌이 하얗게 됐어.”

. 꼭 우리 동네 같네. 다 끝나고 치우자. 이제 설탕이랑 버터를 섞어 볼까?”

아까 사야에게 변명한 대로라면 코코아 가루도 체를 쳐야 할 텐데, 또 사야에게 맡기면 부엌에 갈색이 추가되지 않을까? 이치조는 잠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억눌렀다. 내가 하면 되지. 나름의 납득이었다.

내가 필요한 만큼 덜어 줄 테니까, 서걱거리는 소리 안 들릴 때까지 섞는 거야.”

.”

밀가루 소동을 수습하느라 지체한 시간 덕에 버터는 충분히 실온에 풀어져 있었다. 이치조는 미리 따로 챙겨 둔 설탕을 소꿉친구에게 건넸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사야가 반죽에 설탕 대신 소금을 넣는 실수를 할 뻔했던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야가 그가 정리해 준 대로 설탕과 버터를 섞는 동안 이치조는 급하게 핸드폰으로 쿠키에 코코아를 섞는 레시피를 다시 검색해서 지금 만드는 양에 맞게 계산을 끝냈다. 조용히 코코아 가루를 체에 내리고 있을 무렵, 사야가 다시 이치조를 불렀다.

잇쨩... 나 팔 아파...”

그래? 고생했어. 어디 보자.”

이치조가 확인해 보니 잘 섞였다기보다는 특정 부분에만 몰두해서 섞은 티가 역력했다. 군데군데 녹아들지 않고 남은 설탕이 보였다.

열심히 했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한 거였다. 칭찬의 의미로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양 손이 모두 온통 밀가루 투성이라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치조는 그 대신 사야에게 흐뭇하게 웃어 준 뒤 다음 작업을 이행하기로 했다.

이제 달걀도 넣어야지.”

.”

지켜보고 있어 봐. 이건 내가 할게. 제대로 되는지 잘 보고 있어야 해?”

사야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신호 삼아 이치조는 곧장 움직였다. 달걀을 하나씩 톡톡 깨서 넣고, 체로 쳐 둔 가루들도 슬쩍 가져와서 반죽에 합류시켰다. 그러자 아까부터 부엌에 감돌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더 세게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에 사야가 반죽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좋은 냄새.”

 

그렇게 만든 반죽을 30분간 휴지시킬 동안, 사야는 집에 있던 쿠키 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트리, 천사, 진저브레드, 눈사람, , 별 등등 다양한 모양이 있었다. 그러다가 사야가 이치조를 쳐다보았다.

잇쨩은 어떤 걸로 찍을 거야?”

, 잘 어울리는 걸로.”

지금 그는 오븐을 예열할 세팅을 마친 뒤 달걀흰자와 슈가파우더, 레몬즙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다. 아이싱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지난번 크리스마스에 만들었던 쿠키는 초코 칩으로 모양을 냈었다면, 올해는 아이싱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고른 방법이었다. 사실 그는 그림을 못 그리는 편이었지만 간단한 것 정도라면 괜찮겠지. 사야는 좋아할 거니까. 하고 넘겨짚은 상태였다. , 생각해 보니 색소는 사지 않았는데, 의도하진 않았지만 쿠키가 코코아를 넣어서 짙은 갈색이니 하얀색으로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계란 흰자에 슈가파우더와 레몬즙을 넣고 섞어,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맞춘다.

, 됐다.”

따르릉-!! 그럴 동안 미리 준비한 타이머가 울렸다. 이제 반죽을 꺼내 밀대를 써서 일정한 두께로 밀어야 한다. 이치조가 짤주머니들에 아이싱을 담아 윗부분을 고무줄로 묶을 동안 사야가 밀대를 집어 들었다. 혼자 해보려고 하나, 하고 이치조는 가만히 있었는데, 정작 사야는 그가 행주에 물을 묻혀 짤주머니 위에 올려둘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도 가만히 이치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이치조의 물음에 사야는 그의 팔 아래로 몸을 기울여,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그 상태로 다시 밀대를 잡고, 머리를 기울여서 뒤통수로 가볍게 그의 가슴팍을 쳤다. 이치조는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알았어.”

결국 둘은 그대로 함께 밀대를 굴렸다. 그 이후 잘 펼쳐진 반죽 위로 쿠키 틀을 올린다. 시간을 지체했지만 반죽이 아직 많이 물러지지 않아서 모양이 깔끔하게 찍혀 나왔다. 이대로 예쁘게 만들어진 모양들을... 그대로 오븐에 차곡차곡 밀어 넣어 15분 정도 구워 준다. 그러면 기본 쿠키 베이스는 완성되는 셈이었다.

 

오븐이 맡은 일을 마치고 띵! 하는 소리가 울리면 잘 구워진 쿠키들은 이치조가 오븐장갑 끼고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아이싱을 올릴 차례가 왔다. 짤주머니 끝을 잘라 각자 하나씩 들고, 살짝 식힌 짙은 갈색 위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얼마나 작업을 했을까, 진행되는 과정들을 한참 바라보던 사야가 물었다.

잇쨩, 이게 뭐야?”

산타.”

아무리 봐도 비둘기인데. 그럼 이건? 고양이?”

리본이야.”

“...아냐, 이건 흘러내리는 고양이야, 잇쨩. 우리 집 앞에 늘어져 있는 길고양이가 이런 자세로 있어.”

아하하...”

결국 이치조는 쿠키 위에 지그재그로 하얀 선을 거칠게 긋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면 못 그리는 게 티가 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 옆에서 사야는 열심히 눈꽃을 그리고 있었다. 프로만큼 정교하진 않아도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쿠키가 하얀 옷을 입었다. 아까 레시피를 볼 때 아이싱은 생각보다 굳는 게 느리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걸 기억하고 있던 이치조는 조심스럽게 쿠키를 모아 쟁반 위에 줄지어 놓았다.

잘 굳으면 가족들한테도 나누어 줄 수 있을 거 같아. 잘 됐다.”

“...”

그러다, 사야가 이치조를 쳐다보았다.

?”

우리가 고생했으니까 우리가 제일 먼저 먹어야지.”

사야는 이치조 옆에 딱 붙어 서서 말했다.

코코아 타 줘. 같이 먹게. 아까 쿠키랑 같이 코코아 마시자면서.”

알겠어. 그런데 우선 손을 씻고. 코코아에 밀가루 들어가면 안 되잖아. 그치? 먼저 씻고 기다려. 나도 뒷정리 하고 바로 손 씻고 코코아 타 줄게.”

이치조의 설득에 납득한 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화장실로 종종걸음을 옮기자, 이치조는 부엌의 상태를 돌아보고 약간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부엌은 밀가루로 하얬기 때문이다.

서둘러야겠네.”

사야에게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너무 기다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청소하는 동안 쿠키에 먼지가 묻지 않게 덮어 두려고 덮개를 찾아보았다. 막 쟁반 위로 덮개를 덮으려던 순간, 그는 한 쿠키를 발견했다.

...”

가슴에 하트를 달고 안경을 쓴 진저브레드 모양 쿠키가 있었다. 안경알 둘 사이에는 작고 긴 점도 찍혀 있다. 그는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없다. 이걸 만든 적도 없다. 분명 사야의 솜씨였다.

하하하!”

이치조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디저트>

 

안녕하세요, 신청자님! 믿고 재방문 감사드립니다. 여기는 오늘도 귀여운 페어를 다시 만나 기쁜 글백반집입니다.

 

원하시는 플롯을 받았을 때, 생각해 보니 너무 이치조가 다 일을 해 버리면 사야가 요리를 못 하는 귀여움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고 반대로 사야가 혼자 너무 사고를 치게 마냥 내버려두면 이치조가 제대로 보호자 캐릭터로서 매력 어필을 못 하기 때문에 적당한 조절을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몽글몽글하게 애정을 주고받는 페어를 그리고 싶었어요. 특히 믿음이라는 부분에서요. 기본적으로 둘 다 소꿉친구로 오래 서로를 봐 왔기에 서로가 이런 행동을 할 거야, 어떻게 도와 줄 거야 같은 생각들이 잔뜩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요리를 할 때 사야는 은근히 이치조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같은 생각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 이 페어 역시 너무 귀여워요.

 

글자수가 적어서 요리는 간단한 쿠키로 준비했습니다. 아마 이 뒤에 둘이 맛있게 함께 먹지 않을까 합니다. 그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즐거움 역시 보고 싶으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묘사할 때, 사야도 장난기가 있고 떼 쓸 줄도 아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성적으로 설득하면 말을 들어주는 타입이라는 것에 집중해서 작업했습니다. 특히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이치조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이치조가 사야의 젬병 수준인 요리 실력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작년에 뭘 했었는지 같은 걸 생각하게 해서 자연스럽게 그걸 떠올리고 보조를 하게 맞췄습니다. 작년에는 소금하고 설탕을 헷갈릴 뻔했고... 그리고 올해도 사야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중력분이랑 박력분을 몰라서 아무거나 가져오는 사야... 귀엽네요.

그런데,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특별 쿠키라는 그 느낌을 살리려면 아이싱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의외로 이치조가 아이싱을 하면 못 할 거다! 하는 자료가 돌아와서 꽤 놀랐습니다. , 이런 반전 매력 너무 귀여워요. 보호자 캐릭터라고 하면 보통 이것저것 다 잘 하는 만능이라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있는 편이고, 지금까지 자료 받은 이치조도 너무 어른스럽고 상냥한 인상에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었던 와중 캐릭터의 약점을 알게 된 거 같아서 재밌었습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사야는 중상 정도로 잘 할 거라는 게 너무... 너무 귀엽잖아요. 자기는 못 하는데 사야를 생각해서 이렇게 진행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 장면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야가 (사실 이치조가 무안할까 봐 감정을 배려한다기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지만) 너무 대놓고 못 만든다고 직언을 하기보다는 이건 다른 거라고 말하는 게 이어지는데, 장난기랑 나름 이치조를 생각하는 마음이 섞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야도 이치조가 그림 못 그리는 거 알 듯 싶거든요. 그럼 자신을 위해서 신경썼구나, 하고 생각이 들 테니까요.

... 이건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막판에 가슴에 하트를 달고 안경을 쓴 진저브레드 모양 쿠키는 사야가 이치조를 생각하면서 만든 게 맞습니다. 말이 적고 표현이 서툴러서, 밀대로 반죽 밀 때도 같이 하자는 말 대신 행동으로 뜻을 알릴 거 같은 아이가, 내심 감사를 전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소한 귀여움들이 모여, 엄청난 귀여움이 되었습니다.

 

이거 쓸 때 귀엽다는 이야기를 대체 몇 번 했지... 아무튼 이 페어는 귀여운 게 맞아요. 그런 페어가 같이 달달한 거 만든다는 게 귀여운 거 같아요. 정말 좋았습니다.

 

작업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둘이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한글 기준 본문 (공포) 4369, 디저트 1799자

240918 마미님 커미션-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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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약속에 늦은 걸 사과하는 방법

부제: 언제나 널 생각해

 

<소설 타입> 3천자 시작 + 디저트 (이니셜 옵션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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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밀집 지역에서 한 남학생이 달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 그대로, 옆으로 메는 가방을 꽉 붙잡고 앞만을 보며 정신없이 달리던 그는 이윽고 근처 중학교 앞에 멈춰 섰다.

그 학교의 정문 교문 앞에는 그 중학교의 교복 차림을 한 여학생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제는 하교하는 학생들도 거의 다 빠져나가버린 늦은 시간이라서 그녀는 말 그대로 혼자였다.

자신의 앞에서 거세게 일그러진 숨을 고르는 남학생을 보며 여학생이 곧장 조용히 말했다.

“...늦었어.”

하아, 하아...”

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그녀가 조금 더 분명한 발음으로 다시 말했다.

늦었어, 잇쨩.”

그랬다. 잇쨩, 그러니까 이 소년 나와 이치조는 지금 소꿉친구 소녀, 와즈카 사야와의 약속에 형편없이 늦어버린 참이었다.

 

우선 이치조를 위해 변명을 해 주자면, 그는 바빴다. 그의 학교는 곧 축제를 앞두고 있었다. 웬만한 일본의 고등학교가 그렇듯 축제는 큰 문제였다. 원래는 하교 시간에 동아리에 소속되지 않은 학생들은 바로 하교를 하도록 하는 학교 규정도 축제 준비 기간에는 학교에 학생들이 잔류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 같은 반에 동아리에 소속된 학생들이 저마다 자기네 공연 준비와 전시 준비로 정신이 없다 보니, 귀가부인 학생들도 그 열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치조도 그런 귀가부 소속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 여기 좀 도와 줘. 이거 조립이 안 돼.”

포스터물감 더 가져와 줄 사람 구함!! 지금 손이 남는 사람이 없어!”

반마다 나름대로의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동아리가 없다고 해도 각 반 별로 이것저것 유령의 집이니 카페니 여러 가지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동아리에 소속된 인원이 따로 그 동아리에 차출되어 나가버려서 일손이 없었던 것도 문제를 키우는 데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치조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다.

너 손 남지? 이거 좀 자르고 있어 봐.”

? , ...”

좀 이따가 사야를 만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하며 핸드폰을 보고 있던 그는, 옆에 있던 같은 반 남학생들에게 시트지와 칼과 골판지 한 묶음을 건네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치조는 그가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축제 기간이라 그도 아예 발을 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야와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서 여유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큰 실수였다.

준비한 소품 어디 있어?”

, 페인트 엎었어!!”

누구 셀로판지 더 사 올 사람?”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했다. 손은 계속 모자랐다. 게다가 이치조가 그 틈새로 얼추 일을 끝내고 나가려고만 하면 목소리 큰 누군가가 계속 그를 붙잡았다.

나와 군! 이거 봐봐. 너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 나는...”

결국 이치조는 이 끝이 모호한 수많은 신호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계속 축제 준비 소동에 붙들려 헤매고 있었다. 그런 이치조를 늦게라도 구해 준 건 그러다 다른 학생이 우연히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던 한 마디였다.

, 그러고 보니 너 이번 축제에 와즈카였나, 그 여자애도 초대하기로 했다며. 아직도 우리 반이 뭘 하는지 걔한테 비밀로 했어?”

그 말을 듣자 이치조는 마치 어두운 혼돈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빛은 동시에 그를 번개처럼 후려쳤다.

, 맙소사!”

사야를 떠올리자마자 그는 벽에 걸린 시계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여유 시간으로 잡아 둔 시간에서도 한참 지나 있었다. 곧장 들고 있던 드라이버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통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화면에 잔뜩 뜨는 사야의 이름을 보자마자 이치조는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멨다.

미안해, 나 일이 있어서 가 볼게!”

나와 군, 너 어디 가냐?! -”

뒷말은 듣지 못했다. 사실 듣지도 않았다. 이치조는 스스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야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지?! 그래서 그는 계속 달렸다. 선생님들이 봤다면 한 소리를 했을 수준으로 빠르게 복도를 뛰어갔다. 신발장에서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다시 허둥지둥 뛰어갔다. 우리 학교랑 사야의 학교까지의 거리가 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이어서 다행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 장소에 있던 사야를 보았을 때...

“...늦었어.”

사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치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하아, 하아...”

늦었어, 잇쨩.”

사야는 혼자 팔짱을 척 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치조는 이건 자기가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까 얼핏 본 부재중 통화 기록에 찍혀 있던 시간들은 하나같이 한 시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야는 여유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왜 이치조가 안 오는지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치조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연락해도 받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연락 시도를 그만둔 채 덩그러니 약속 장소에 홀로 서 있었을 것이다. 이치조는 자신이 오기 전 앞서 있었을 그 상황을 머릿속에 훤히 그릴 수 있었다.

“...”

이치조는 사야의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다행인지, 사야는 아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화가 폭발한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그냥 떠났을 것이었다.

“...왜 그랬어?”

사야가 물었다.

왜 오지 않았어? 연락은 왜 받지 않았어?”

미안해.”

이치조는 곧장 사과를 시작했다.

빠져나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혼란스러워서 타이밍을 못 잡는 바람에 계속 잡혀 있었어. 일이 생각보다 커졌거든.”

그러자 사야가 대답했다.

알고 있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런 식의 거리감은 계속 생긴다는 거.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해서 약속을 했는데 늦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정말로 필요한 말만 딱딱 던지는 사야 특유의 말투였다. 지금 사야는 그의 손에 묻어 있는 물감 얼룩과 머리에 묻은 종이 먼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치조는 누가 봐도 약속을 잊고 일하다 온 사람이었다.

.”

그 순간 이치조는 확신했다. 사야가 왜 오지 않았어?” 라고 물은 건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제 보니 팔 뒤로 들어간 사야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사야가 팔짱을 껴서 손을 숨긴 건 그런 불안한 감정을 감추려는 의도도 적잖이 섞였을 터였다. 이치조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정말 깊은 관심을 갖고 대하고 있었으니, 이번 일로 느낀 충격이 상당히 컸으리라.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말은 확실했다.

사야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야.”

이치조는 안경 렌즈 너머로 사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사야를 우리 학교 축제에 초대하고 싶었어. 그래서 내가 있을 수 있는 시간 동안은 집중해서 준비를 도우려고 했어. 축제 준비가 잘 끝나야 사야를 초대할 수 있으니까.”

“...”

사야가 말이 없어졌다. 듣고 있다는 뜻이다. 이치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준비를 돕기로 정한 시간이 끝나면 당연히 너를 만나러 가서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하고, 축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너무 일이 정신이 없어서 시간을 잊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내 잘못이야.”

 

그러다 그가 시선을 푹 숙였을 때,

“...바보.”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야?”

그런 거...”

이치조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시야에 보이는 사야는 어느새 팔짱을 풀고선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 주먹이 몇 방 이치조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그녀는 근력이 낮은 편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치조가 느끼기에는 어쩐지 마음 한 켠을 찌르르 때리는 느낌이었다.

잇쨩 정말 미워,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야, 정말 미워...”

그래서 이치조는 일부러 조금 장난스럽게 굴었다.

사야...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그 말에 잠시 허공에 주먹을 멈칫하고 들었던 사야는 이윽고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진짜?”

. 난 항상 사야를 생각하고 있는걸. 그러니까 사야가 그런 말을 하면 상처 받는 거지. 비록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말이야.”

이치조는 주먹을 쥐더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 펼쳐서 내밀었다. 약속, 하는 포즈였다.

그러니 약속할게. 앞으로는 널 생각하는 만큼 그걸 너에게 말할 타이밍도 놓치지 않겠다고. 약속도 잘 지키고.”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사야는 똑같이 손을 움직여서 이치조의 손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잇쨩... 약속해야 해.”

알았어.”

이치조의 확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야가 작게 웃었다. 그러다 그녀가 그의 품에 쏙 파고들었다.

나 잇쨩을 기다리느라 지쳤어. 코코아 사 줘.”

, 알겠어.”

그녀의 작은 어리광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오늘은 원래도 그러기로 했었고, 지금 그는 그녀에게 빚이 있었으니까, 그 정도쯤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었다.

 

 

 

<디저트>

 

안녕하세요, 신청자님. 재방문 감사합니다. 여기는 다시 한 번 귀여운 페어를 다루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글백반집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원하시는 플롯이 명확한 상태에서 진행한 작업이었는데요. 약속을 본의 아니게 파토 내 버린 이치조와 그를 계속 기다리다가 삐져 버린 사야라는 플롯을 받고 어떤 느낌으로 글을 써야 신청자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까? 하고 고민을 거듭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강조한 포인트는 서로가 있는 것이 당연한 두 사람입니다. 지난번 신청 때하고 똑같은 화제이지만 살짝 다르게 담아 보았습니다.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는 페어라서, 지금도 이치조는 고1인데 사야는 중3이죠. 어릴 때도 이치조가 상급 학교에 먼저 진학을 해 버렸을 테고, 더 자라면 대학 입시도 이치조가 먼저 시작합니다. 사야가 이치조에게 마구 어리광을 부리고 내심 보호자로 여기는 만큼, 나이 차이 때문에 생기는 이런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내심 신경 쓰고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이치조가 오지 않는 것에 겁을 먹어버린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야가 말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가급적 필요한 말만 던지도록 노력했습니다. (대사로는 대놓고 앞서 말한 것들이 무서워, 하고 말하게 하는 대신 간단하게 상황 전달만 시키고 행동 묘사로 자연스럽게 불안함을 어필 시켰습니다.) 게다가 무슨 느낌이냐면 어리광부리고 싶은데 (오지 않아서 자신을 겁준 데 대해) 삐진 상태라 스킨십 하기는 아직 싫다. 상태입니다. 아빠 미워, 하고 토라진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이치조가 자신을 줄곧 생각해 주고 있었더라는 사실을 인지해 기분이 풀리니까 그제야 이치조한테 안기고 다시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치조도, 같은 점을 알면서도 계속 사야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려고 이것저것 설정을 붙여 놓았습니다. 고등학교 축제에 사야를 초대하려고 생각했다는 점이나 어떻게 사야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지?! 하고 있다거나 난 항상 사야를 생각하고 있는걸. (후략)” 같은 대사를 집어넣었습니다.

 

사실 플롯의 뼈대를 보고 거기에 살을 붙일 개연성은 제가 이것저것 붙여 보았습니다. 사실 이치조가 약속을 까맣게 잊고 늦게 하교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둘이 만나기로 약속할 법한 장소가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앞인 거예요. (이유: 가깝기 때문에) 그런데 학교들이 가깝다고 했으니 그냥 하교를 시켰다가는 그냥 마주치지 않을까? 하고, 뒤늦게 약속을 자각하는 장면을 만족스러운 만큼 넣을 수가 없을 거 같아서 작중 내용처럼 되었습니다. (일을 다 돕지 않고 중간에 뛰쳐나가는 이치조) 그리고 이치조가 사야를 달래는 장면은 앞서 말한 것들을 생각하며 정리했습니다. 꼭 넣어달라고 하셨던 사야의 심한 말들(바보, 미워!)을 듣고 이치조가 장난스럽게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같은 뉘앙스의 대답을 하는 것도 이유를 자연스럽게 만져 넣었습니다. (계속 사야를 생각하고 있으니 상처받는다는 말로요.) “그러니 약속할게. 앞으로는 널 생각하는 만큼 그걸 너에게 말할 타이밍도 놓치지 않겠다고. 약속도 잘 지키고.” 이치조의 이 대사가 핵심입니다. 이치조는 성숙하고 책임감 강한 성격인 만큼 사야가 불안해하는 게 어느 지점인지 잘 알고 있을 거 같아요. 저 대사에 앞으로는, 이라는 단어가 있죠. 앞으로도 (나이가 어찌됐든) 같이 있을 거라는 말이라서 사야를 안심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감정적인 호소보다는 ISTP 타입인 사야가 좋아할 규칙을 잘 지키겠다는 이성적인 말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치조가 사야를 설득할 때 이치조는 안경 렌즈 너머로 사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는 묘사가 들어갔는데, 이 묘사는 지난 작업물의 사야는 이치조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며 소꿉친구의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장면을 떠올리면서 작업했습니다. 그의 따뜻하고 진심어린 생각을 담은 눈이 좋아요.

 

다시 한 번 귀여운 페어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다룰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날 되세요. :D

 

 

한글 기준 본문 (공포) 4298, 디저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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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관으로 신청
 
제목: 그 겨울밤을 보내는 방법
부제: 둘 사이의 당연함
 
<소설 타입> 3천자 시작 + 디저트 (이니셜 옵션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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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치조는 갑자기 핸드폰에 날아든 문자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방의 전깃불은 꺼져 있었지만 책상 위 스탠드가 켜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핸드폰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잇쨩. 나 지금 잇쨩 집에 갈게.]
직전까지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던 그는 문자를 다 읽자마자 창밖을 보았다. 상당히 어두웠고 하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보자 제법 두꺼운 파자마를 입고 있었음에도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큰 눈송이가 연거푸 붉은 옷소매 위로 떨어졌다.
그는 즉각 창문을 닫고 전기난로를 끈 뒤 자신의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현관이었다.
 
그가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치조는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 잇쨩.”
눈송이들과 함께 훅 들이닥치는 찬 공기 사이로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길고 하얀 패딩 코트를 입고 초록색 목도리를 두른 연둣빛 머리칼의 소녀는 이치조의 오랜 소꿉친구 와즈카 사야였다. 그녀의 한 손에는 빨간색 썰매가,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바로 문자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사야. 여태 썰매를 탄 거야?”
“응.”
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현관 안으로 들어와 썰매를 벽에 기대 놓고 신발을 벗었다. 신나게 썰매를 타다가 와서 그런지 조금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그녀를 더 작은 동물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좀 재워줘. 놀다 보니 폭설이라서 집에 못 갈 상태가 되었더라고.”
“일단 들어와. 부모님은? 연락해 봤어?”
“응. 괜찮대.”
사야는 이치조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며 소꿉친구의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래 봐 온 만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따뜻한 눈이었다. 그 눈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서,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집에 왔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대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치조의 방으로 들어갔다. 외투를 벗어서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 둔 사야가 이치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기다려, 우리 부모님한테 이야기해야 하고. 손도 녹이고 있어.”
이치조는 방에 있던 전기난로를 다시 켜서 사야 쪽으로 돌려주었다. 사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소꿉친구는 10분 정도 뒤에 돌아왔다. 부모님이 허락을 금방 해 주셨을 텐데, 왜 이렇게 늦지 하고 사야가 막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돌아온 이치조의 손에는 머그컵이 놓인 조그만 쟁반이 들려 있었다.
“마셔. 밖에서 오래 놀아서 속까지 추워졌을 거야.”
머그컵 안에는 데운 우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우유 특유의 고소한 냄새뿐 아니라 희미하게 단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야가 우유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그것은 확신할 수 있는 맛이 되었다.
“설탕, 넣었지?”
“그럼, 물론이지. 듬뿍 넣었어.”
이치조의 끄덕임에 사야는 설탕 넣고 데운 우유를 홀짝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치조가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응. 먹고 집을 나섰어.”
“다행이네.”
차분한 대답에 이치조가 조금 웃어 보였다.
“네가 자고 간다고 우리 부모님한테도 말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구나.”
이치조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둘은 잠시 함께 난롯불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이치조는 문득 사야의 옷차림을 보았다. 겉에 입었던 하얀 패딩을 벗었더니 그 안에 입고 있던 두껍고 검은 후드 티가 보였다. 확실히 따뜻하긴 하겠지만 외출복이라서 잠들기에는 불편한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옷... 그 상태로 잘 건 아니지?”
“에, 그런가.”
사야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치조를 바라보았다.
“잇쨩.”
“응. 내 옷 빌려줄 테니까.”
무언의 부탁에 이치조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옷장에서 파자마를 한 벌 더 꺼내 사야가 앉은 자리 옆에 놓은 그가 몸을 틀었다.
“갈아입고 불러, 알았지?”
 
그 이후로 이치조는 얼마 간 제 방문을 닫고 그 앞에 서 있었다. 문 근처 벽에 기대어 잠시 기다리고 있었더니 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입었어.”
“알았어, 그러면 들어갈게.”
이치조는 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아니, 사야가 먼저 문손잡이를 잡고 당겨서 연 것이었다. 활짝 열진 않았지만 너무 조금 열지도 않았다. 딱 이치조가 다시 들어오기에 알맞은 정도로 문이 열렸다.
“너한테는 소매가 조금 길 텐데. 괜찮아?”
“응. 접으면 괜찮을 거 같아.”
이치조의 걱정에 사야가 손으로 소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녀는 긴팔 파자마의 소매를 대강 말아올려 입고 있었다.
“그래.”
이치조는 당연한 일처럼 조용히 손을 뻗어서 그 소매를 매만져, 제대로 고쳐 접었다. 한쪽 소매를 먼저 고쳐 접고 반대쪽 소매를 고칠 동안 사야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있잖아.”
“응.”
“이 옷, 잇쨩 냄새가 나.”
사야가 이 말을 했을 때쯤 양 손 소매가 모두 깔끔하게 접혔다. 그래서 이치조는 곧장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그녀의 발언에 멈칫했다.
“...그, 그래서 불편해?”
“아니.”
이치조의 물음에 사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이냐고 하면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해.”
그녀는 양쪽으로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내리며 웃었다.
“잇쨩이 있으면 나는 편안하니까. 같이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이치조는 묘하게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편안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그가 말했다.
“그럼 이제 잘래? 너도 오래 논 거 같아서, 피곤할 텐데.”
“응.”
짧은 대화 이후 둘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치조가 이불을 치웠다. 침대에 누운 그는 머리맡에 안경을 두었다. 안경을 벗고 나니 시야가 온통 뿌옇게 보였다. 그러고 나자 침대 한쪽으로 무언가의 무게가 더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로도 알 수 있었다. 사야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꼬물꼬물 움직여 이치조의 가슴팍 근처까지 다가갔다. 이치조는 무의식적으로 슬쩍 그녀를 안아 주려다가 잊어버린 것을 떠올렸다.
“아... 잠시만. 기다려, 불 꺼야지.”
이치조는 급히 다시 안경을 집어 들고 상체를 일으켰다. 안경을 쓰고 침대를 나가려는데 허리에 묵직한 무게가 매달려서 그의 행동을 가로막는 것이 느껴졌다.
“사야?”
“...”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말없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사야를 바라보던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야, 불을 켜고 잘 수는 없잖아.”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허리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의 몸에 기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이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잇쨩.”
“응. 나 여기 있어.”
“...응. 잘 자.”
그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그제야 슬그머니 무게가 멀어졌다. 이치조는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나, 스탠드 불을 끈 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안경을 벗어놓고 이불을 덮자마자 다시 그의 가슴팍 근처에 인기척이 나타났다.
“잘 자, 사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다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 팔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따뜻하게 잠들 것 같네. 이치조는 조용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수마에 몸을 맡길 때쯤에는 조금 더 먼저 잠이 든 조용한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디저트>
 
안녕하세요, 신청자님!
너무 귀여운 페어가 들어와서 정말 좋았어요. 자료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귀여운 거 있죠. 챙겨주는 오빠 + 그런 오빠가 있어서 내심 좋은 여동생 같은 느낌... 게다가 서로 없으면 큰일 나는 사이라는 게 정말 좋았어요.
 
이들의 관계에는 당연함이 전제가 되는 거 같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계속 같이 있었기에 일상에서 함께 겪어 온 수많은 기억들과 정보들이 있어서 서로가 점점 더 편해지고 당연해지는 느낌 참 좋았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뭔가 둘 사이에 있는 그 ‘당연함’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그 느낌을 주신 플롯에 그대로 담아 봤는데요. 집에 가기 어려워졌을 때 갈 곳으로 떠올린 게 당연하다는 듯 이치조의 집인 사야라거나, 사야를 챙겨주는 게 일상을 넘어 당연한 전제가 되어 버린 이치조라거나... 재워줘, 한 상황 그 이후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는 게 참 흥미로웠습니다. 자료를 참고해도 / 제 생각에도 그냥 뭔가 자연스럽게 같이 잘 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애정 가득하고 순애지만 연애하는 커플스러운 분위기는 내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보다 다양한 행동으로 꽉 채워 담아 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서로가 옆에 있을 만큼 편하고 소중하다는 감각도 당연함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입 밖에 일부러 꺼내 놓지도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치조가 여러 모로 챙겨주는 거나, 사야가 거의 말없이 스킨십을 하는 마지막 장면 등으로 녹여 보았어요. (이 점에는 사야가 말을 딱딱하게 해도 표현이 서투른 거지, 그렇다고 너무 무감정한 로봇처럼만 보이는 거 역시 NG라고 생각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청자님이 작업물에 꼭 넣어주길 바라셨던 핵심 장면, 사야가 이치조의 옷을 입고 잇쨩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잇쨩이 있으면 나는 편안하니까. 같이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하는 대사로 살짝 제 감상을 넣어 봤습니다.
사실 대사를 쓸 때 캐릭터 설정에서 ISFJ와 ISTP의 이야기라는 점을 참고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둘의 성격 포인트를 최대한 보여주려고 했어요. 둘의 성격이 맞물리는 부분이 이 둘의 맛있는 포인트이기 때문이죠. 이치조한테는 ISFJ 특유의 안정을 좋아하고 남을 돌보는데 그 와중에 체계적이기도 한 모습을 넣으려고 노력했고, ISTP의 특징 중에 자기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친구다. 가까운 사람에게만 허물없이 대한다. 필요한 말만 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안 한다. 같은 걸 조합해서 사야의 대사는 하나하나 매우 신중하게 배치해야 했습니다. 진심으로 이치조를 편하게 여기고 좋아하고 있다. 하는 느낌을 내려고 노력했고, 이치조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면서도 말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어색해지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썼습니다. (사야는 이치조와 오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ISFJ 성격인 그에게는 최대한 명확하게 설명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을 거 같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치조는 사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다 전달하려고 하면 사야의 캐릭터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미 이치조가 아는 것을 아니 그런 것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글 분위기 잡을 때 자료 중에 있었던 같이 자고 있는 이치조와 사야를 계속 보면서 작업했습니다. 덩치 차 나는 페어 좋아요. 상냥한 보호자 캐릭터랑 그 상냥함을 서툴게나마 감사해하는 캐릭터의 합이 좋아요. 너무 귀여워서 좋았어요. 지금 다시 봐도 귀엽네요. 대체 귀엽다는 말을 몇 번 쓴 건지 모를 만큼 귀여워요. 앞으로도 이 매력둥이 둘이 사이좋게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정말 설탕 넣고 데운 우유 같은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페어인 만큼 이 페어의 멋짐을 아낌없이 담아보려 노력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계속해서 여러 가지 느낌이 올라오는 게 마치 자꾸 떠올리게 되는 달콤함을 가진 거 같기도 하네요.
 
신청 감사했습니다. 귀여운 페어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날 되세요. :)
 
 
한글 기준 본문 (공포) 3513자, 디저트 194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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